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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애플 창업배경 


스티브 잡스의 소년시절


스티브 잡스는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 입양되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휴렛팩커드(HP)에 근무하는 엔지니어가 이웃에 거주하여 다양한 전자공학의 기초 지식을 경험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SteveWozniak)과 처음 만났고, 둘은 같은 고등학교에 가면서까지 친분을 유지했다. 스티브 잡스는 홈스테드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맥콜럼의 전자공학 교실에 들어갔다(MichaelMoritz,2010:87). 


당시 선풍적인 인기였던 전자공학에 관심이 많았던 덕분에, 잡스는 우연한 기회에 휴렛팩커드에서 견학도 하고 생산라인에서 아르바이트도 하였다. 또한,잡스는 주말에 몇 번 서티베일의 홀티드스페셜티즈(HaltedSpecialties)라는 곳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최신 반도체 칩에서 측정기까지 다양한 부품에 대한 가격과 시세를 알게 되면서, 일찍부터 전자부품에 대한 현장 감각을 익히고 있었다. 한편,잡스의 생활에는 전자공학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모험심도 강했으며, 삶이 주는 여러 가지 감흥을 느꼈다. 


잡스는 주파수 계수기와 레이저 빔만큼 예술과 문학과 관련된 취미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문학과 고전영화를 연구하고 트럼펫을 연주하는가 하면, 기묘한 그룹을 결성해 자동차를 학교 카페테리아 지붕 위에 올려놓는 등 이상하고 엉뚱한 일을 벌이기도 했다. 잡스는 수면 박탈 실험을하느라 이틀 동안 밤새기를 여러 번 하기도 하고, 대마초와 마약 등을 하는 등 어릴 때부터 기묘한 발상과 일탈적 행위들을 간혹 하였다. 


스티브 잡스



블루박스 에피소드


1970년대 초, 당시 미국에서는 미국 전신전화회사(AT&T)의 회선을 가로채서 공짜 장거리 전화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전자장치인 블루박스(BlueBox)가 해커들 사이에서 큰 유행을 일으켰다. 이에 호기심 많은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큰 자극을 받았고 오랜 기간 동안 몰입하여 블루박스를 스스로 개발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티브 잡스는 이를 작은 사업으로 전환시켜 블루박스를 판매하기 시작했고,이 때 잡스와 워즈니악은 조립과 판매의 기초적 경험을 다졌다. 그러나 1년 후 잡스는 이 사업이 불법인 동시에, 그 피해자이자 초거대 기업인 AT&T의 추적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고 블루박스 사업에서 손을 뗐다. 




스티브 잡스의 청년시절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선택할 때 부모의 만류에도 결코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는 버클리대학(Berkeley University)과 스탠퍼드대학(Stanford University)과 같은 명문대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오리건(Oregon)주 포틀랜드(Portland)에 있는 리드칼리지(ReedCollege)에 들어갔다. 리드 칼리지는 규모가 작고 진보적 교육방향을 갖고 있었으나 학비가 높았다(MichaelMoritz,2010:117). 잡스는 리드칼리지에서 다양한 학생 집 단을 발견했고, 생전 처음 다른 여러 지역에서 온 학생들과 마주쳤다. 즉 잡스는 처음으로 국제적인 분위기를 맛본 것이다. 


잡스의 동급생이었던 엘리자베스 홈스는 당시 학교 분위기를 “1970년대 리드칼리지는 외톨이와 괴짜들의 캠퍼스였다”고 평하기도 했다. 잡스는 ‘괴짜들의 캠퍼스’중에서도 괴짜였고 그만의 강한 호기심과 정신력은 대학에서 더욱 빛을 발하여 많은 독특한 실험을 일삼았다. 잡스는 도서관에서 불교 서적을 읽으며 선불교에 매료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잡스의 가치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후 잡스는 경험보다 직관이 더욱 차원 높은 지적 상태라고 믿게 되었고,종종 콧케(대학교 친구;필자)의 침대 위에 향을 피우고 인도산 더리(Dhurrie)양탄자를 깔아 그 위에서 명상을 했으며(MichaelMoritz,2010:122), 1학년 말에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특히 과일을 많이 섭취하였는데 훗날 창업한 ‘애플’이라는 기업명과 무관하지 않다. 


잡스는 그 후 학교를 중퇴하게 되는데 이 짧은 대학에서 의 체험이 뒤에 그의 인문학적 경영 사고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자퇴 후에도 잡스는 아름다운 서체를 연구하는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도강하였는데 훗날 매킨토시 컴퓨터에서 보여 지는 혁신적 서체들이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 후 1974년 초,잡스는 인도로 가기로 결심하고 리드칼리지의 비주류 생활을 청산하고, 로스 앨터스의 부모 집으로 돌아와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MichaelMoritz,2010:125).




스티브 잡스의 애플 창업배경


잡스는 인도 여행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던 중 우연히 비디오게임을 개발하는 회사인 아타리(Atari)에서 일하게 되었다. 잡스는 처음으로 오랜 회사 생활을 경험했는데, 그는 회사에서도 매번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보수적 성향의 아타리 직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잡스는 정식으로 전자공학을 배우지 않았지만 곧 기사와 엔지니어의 간극을 뛰어넘었다. 일정한 한계 안에서 작업하면서도 스크린(screen)의 사양에 맞춰 칩들이 최대한 성능을 발휘하도록 했다. 그리고 칩의 섬세한 부분들을 파악했고 새로운 설계도를 작성했으며, 게임의 기능을 크게 향상시키는 등 게임을 개발하는데 창조적 솜씨를 발휘했다(MichaelMoritz,2010:130). 


잡스는 아타리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인도를 여행했다. 인도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돌아온 잡스는 친부모와 양부모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 미래 진로에 대한 문제 등으로 방황하였다. 한편 잡스의 친구 워즈니악은 아마추어 컴퓨터광들 이 결성한 홈브루클럽(Homebrew club)이라는 그룹의 회원으로 활동을 하며 컴퓨터 컨버서(ComputerConversor)라는 자회사를 차렸다. 


그러던 중 휴렛팩커드에 스카우트되어 전임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자신만의 컴퓨터 조립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방황을 일삼던 잡스는 워즈니악이 컴퓨터와 씨름하는 것을 철저히 관찰하며 컴퓨터 개발과 문제점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1976년 초,잡스는 워즈니악의 능력을 보고 반하여, 컴퓨터를 조립하기 위한 인쇄 회로 판을 생산해서 판매하자고 설득하였다.그 해가 바로 애플이 창업되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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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재. "'애플' CEO '스티브잡스'의 인문학적 사고를 적용한 디자인 경영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한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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