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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성장 과정 2편

 

1) 스티브 잡스 퇴출 이후 드리운 애플의 위기(1985∼1997)


스티브 잡스가 퇴출당한 이후 애플은 존 스컬리가 회사조직을 운영하고 장 루이 가세(JeanLouisGassée)가 연구 개발을 지휘했으며 마이클 스핀들러가 마케팅을 맡는 삼두체제를 구성했다. 스컬리가 CEO로 있었던 10년 동안 애플의 매출은 연간 약 10억 달러에서 80억 달러 이상으로 증가했다. 표면적으로 이 숫자는 놀라운 기록으로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달랐다.스컬리는 개인용 컴퓨터를 원하는 시장의 막대한 수요 덕분에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스컬리의 한계는 점점 드러났다. 스컬리가 재임하는 동안 애플은 IBM과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시장을 거의 잠식당하게 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BM에 사용 허가를 해주었던 운영체제를 모든 기업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이 조치로 이른바 'IBM 호환 기종‘이 확산되었다(MichaelMoritz,2010:429). 


그에 따라 매킨토시의 시장점유율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스컬리의 대응책에는 창의적이지 못한 한계가 있었고,한국 기업들을 비롯한 여러 기업들이 저가의 고성능 PC들을 양산하면서 도전해오는 동안 애플 내부의 창의력은 시들어갔다(MichaelMoritz,2010: 430). 매킨토시가 시들해져 갈 무렵 창의력이 부족한 3인방은 과도한 개발을 강행하며 많은 연구비를 탕진한다. 


1989년에는 효율성이 떨어지고 지나치게 고가인 매킨토시 포터블(MacintoshPortable)을 개발해 판매하는가 하면,1991년을 시작으로 수많은 파워북(Powerbook)시리즈를 출시했으며, 1993년에는 존 스컬리가 심혈을 기울여 많은 연구비를 투자한 뉴튼(Newton)을 내놓았지만 소비자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스컬리가 떠나고 그 이후에 들어온 후속 CEO들 역시 애플의 정신을 잊은 채 애플을 더욱 어려움에 빠뜨렸다. 그 결과 1990년대 애플은 쇠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애플의 성장 과정



2) 스티브 잡스의 귀환과 애플의 도약(1998)


애플이 어려움에 봉착하자 애플 이사진은 스티브 잡스가 CEO로 있던 기업 넥스트(NeXT)를 인수하면서 스티브 잡스를 임시 CEO로 고용하며 불러들였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귀환하자마자 초창기에 그가 확립했던 핵심적인 가치관을 재확립함으로써 다른 기업들과 명확히 다른 방향을 추구하게 되었다. 디자인과 혁신이 이 새로운 방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JeffreyL.Cruikshank,2010:102). 잡스는 1997년 여름 애플로 복귀하자마자, 150개에 이르던 프로젝트를 단 10개로 줄였다. 


그리고 그가 취임할 당시 디지털 카메라, PDA,가정용 게임기,스캐너, 프린터 등 60개에 달하는 생산 품목을 4개로 줄였다(김정남,2010:183). 그리고 바로 발포플라스틱으로 만든, 텔레비전 모니터와 특대 크기의 자전거 헬멧을 합쳐놓은 것 같은 흰색 물체를 제시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잡스가 ‘아이맥’이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컴퓨터의 실물 모형이었다(JeffreyL.Cruikshank,2010:102).아이맥에서 아이(i)는 ‘인터넷’과 ‘나’를 상징하는 창의적 패밀리 명칭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좋은 마케팅효과를 가져다주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컴퓨터업계에서는 가격 파괴 바람이 불었다. 따라서 애플도 저가형 컴퓨터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본래 아이맥은 저가의 네트워크 컴퓨터로 고안되었다. 그러나 잡스는 아이맥을 기획하면서 불필요한 장비를 없애고, 일체형 본체를 고집하며 친숙함이 느껴지는 외관과 칼라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리고 컴퓨터를 처음 접하는 만큼 기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자 편의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김정남,2010: 186).그 결과 푸른빛의 반투명한 아이맥은 즉각 히트를 쳤다. 그 후 네가지 다른 색상의 반투명한 아이맥이 출시되었고, 1998년 6월 15일에서 7월 말까지 6주 동안 약 27만 8000대가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김정남,2010:102). 스티브 잡스는 한 가지 제품으로 단숨에 위기의 애플을 구출해낸 것이다. 


내장재가 들여다보이는 반투명 재질(일명 누드 제품)은 그 이전까지 전화기 등 일부 제품에서 이미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색상과 함께 사용된 투명 재질을 컴퓨터에 적용한 것은 위험을 감수한 모험으로 보여 졌다. 그러나 잡스는 컴퓨터의 보급률로 미루어보아, 사용자에게 있어서 컴퓨터는 어려운 기계가 아닌 친숙한 사무용품이자, 유희도구라는 라이프스타일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의 직관력이 제품 시장에 큰 전환을 마련한 계기였다




3) 컴퓨터가 아닌 새로운 시장 진출,아이팟(iPod)(2001)


1990년대 말 애플은 큰 문제에 봉착했다. PC업계의 경쟁사들이 갈수록 저렴한 가격의 보급형 PC를 판매했고 애플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제조하는 유일한 업체로서 시대에 뒤떨어진 비대한 기업이라는 인상을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달리 애플은 다른 기업에게 애플의 기술을 성공적으로 허가해주지도 못했고 시스템 소프트웨어로부터 원 버튼 마우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을 취급할 것을 고집했다. 일각에서는 애플의 독자기술이 너무 비싸고 다른 제품들과 호환도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판매가 곤두박질치면서 애플의 운명이 내리막길로 치닫는 형국이었다(LeanderKahney,2005:38).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애플이 선택한 새로운 진출 영역은 음악이었다. 애플은 새로운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한 태동을 음악과 연관해 모색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그들의 벤치마킹 모델은 소니(Sony)였다. 소니처럼 대중적인 제품을 만들겠다는 것이 애플의 목표였는데 그들이 관심을 가진 분야도 소니의 성공을 이끌었던 휴대용 음악기기 워크맨(Walkman)과 같은 MP3플레이어였다. 


당시 MP3플레이어 시장이 존재했지만 큰 두각을 나타내는 업체는 없었다(김정남,2010:207). 애플은 이미 컴퓨터에서 mp3프로그램인 '아이튠즈(iTunes)'를 개발해놓았기 때문에,아이튠즈의 큰 인기에 힘입어 아이튠즈를 연동한 휴대용 음악기기를 개발하고자 시도하였다. 


잡스는 아이팟 발표 때 “이제 다른 모든 제품(MP3플레이어)들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과감히 말할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잡스가 이토록 자신 있었던 이유는 스티브잡스가 디자인과 인터페이스의 기본 틀을 만들었고, 아이팟 개발이 시작된 이래 스스로의 시간을 100퍼센트 투자했다는 데 있다.


스티브 잡스가 심혈을 기울인 애플만의 하드웨어(iPod), 소프트웨어(iTunes), 온라인 서비스(MusicStore)의 연동은 첨단 기술 제품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유기적 연결을 자랑했다(LeanderKahney,2005:38). 사실 초기 아이팟은 도시바(Toshiba)의 하드드라이브, 소니(Sony)의 배터리(battery),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와 샤프(Sharp)의 핵심 칩 등 여러 기성 부품으로 조립되었다. 기본 하드웨어 디자인조차 도 실리콘 밸리(SiliconValley)의 소규모 벤처기업인 포탈플레이어로부터 사용권을 허가받은 것이다(LeanderKahney,2005:71). 


그러나 아이팟에 대해 울프슨의 마케팅 담당 부사장은 어떤 인터뷰에서 “아이팟의 참된 가치는 이 모든 부품을 한데 모아 조립하고, 디자인을 최적화하여 최고의 성능을 수행하고, 최대한 전력을 활용하며, 최고의 오디오 기능을 발휘하게 한 것에 있다”고 평했다.


즉 아이팟에서 보여주는 애플의 디자인 능력은 기술의 선도나 우수한 외형디자인이 아니다.사용자에게 최고의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 여러 곳에 사용권을 지불하면서까지 애플 제품에 맞는 좋은 기술과 부품들을 빌려와서 최고의 성능효율과 인터페이스를 구현할 수 있도록 재조합하여 디자인하는 능력이 바로 애플의 핵심적 능력이자 가치이다. 


아이팟이 등장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디자인 아이덴티티는 바로 흰색 이어폰이다.사실 당시 이어폰을 흰색으로 정한 것은 플레이어와 단순히 색상을 통일시키려던 의도의 결과이다(LeanderKahney,2005:85). 


그러나 우연히 결정된 흰색 이어폰 채용은 운 좋게도 아이팟의 또 다른 상징이 되었다. 이어폰은 어두운 색이어야 한다는 통념이 깔려 있을 당시에 흰색 이어폰을 꼽고 다니는 것만 으로도 아이팟의 홍보효과가 톡톡했던 것이다. 아이팟은 전 세계 시장점유율의 3%밖에 되지 않는 매킨토시에서만 아이튠즈가 연동되었기 때문에 출시 초기에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 윈도우용 아이튠즈를 개발하고 접속 방식을 USB2방식을 채용하면서부터 반응은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애플에 따르면 뮤직스토어의 윈도우용 서비스는 개시 후 첫 3일 동안 백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했고 2005년 초반에는 온라인에서 판매하는 음악의 75퍼센트를 점유했다




4) 또 한 번의 혁신,아이폰(iPhone)(2007)


2007년 스티브 잡스가 공개한 아이폰은 기존의 아이팟 기능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아이팟의 작동 방식보다 훨씬 더 업그레이드 된 멀티 터치(Multi-touch)인터페이스와 모바일 인터넷 기능을 선보임으로써 소비자들과 경쟁 기업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기존의 휴대폰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전혀 새로운 방식의 아이폰이 탄생하게 된 데는, 분명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휴대 전화 업계의 상식, 단말기의 사양, 개발 방법에 치우치지 않고 백지 상태부터 시작해 자유로운 발상을 토대로 구상했기 때문이다(HayashiNobuyuki,2007:66).스티브 잡스는 이미 2001년 아이팟이 탄생할 당시 ‘디지털 허브(DigitalHub)’구상을 발표했었다(HayashiNobuyuki,2007:71). 


아이폰의 구체적 디자인은 몇 년 후에 구상되었을지라도 디지털 기기를 바탕으로 ‘디지털 허브(digitalhub)’를 구축하겠다는 커다란 디자인적 사고는 이미 아이폰이 나오기 훨씬 전인 2000년 초반에 했던 것이다. 이러한 큰 밑그림을 바탕으로 지금의 아이폰이 탄생하였다.


여기서의 디지털 허브는 공상과학의 현실화를 꿈꾸며 기술적 선도를 중심으로 한 최첨단 디지털 라이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폰의 단순화에 최적화된 외형 디자인과 인터페이스, 소프트웨어 연동 시스템, 전용 마켓(앱 스토어), UX(UsereXperience)등은 모두 사용자가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즐거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균형 있게 조합된 요소들이다. 결정적으로, 애플은 이만큼의 서비스 제공을 위해,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필요한 모든 요소를 직접 기획, 디자인, 지휘감독을 도맡았다.


2020/08/27 - [교육] - 스티브 잡스의 애플 창업배경 알아보기

2020/08/27 - [교육] - 애플의 성장 과정 1편 - 스티븐 잡스의 퇴출


주성재. "'애플' CEO '스티브잡스'의 인문학적 사고를 적용한 디자인 경영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한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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