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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성장 과정 1편


1) 애플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개발,애플I(AppleI)(1976)


애플I은 스티븐 워즈니악(SteveWozniak)의 첫 번째 개인용 컴퓨터 발명품이었다.스티브 잡스가 워즈니악의 뛰어난 컴퓨터 제작능력에 반하여 완제품 판매를 설득 끝에,애플I을 개발하였다(apple-history web site).회사의 이름을 ‘애플’로 정하게 된 데는 사실 대단히 즉흥적이었다. 어느 날 오후 잡스가 어느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문득 회사 이름을 ‘애플컴퓨터’로 하자고 제안한 데서 탄생했다(MichaelMoritz,2010: 184).


애플I은 당시 유일하게 내장 프린팅 된 서킷 보드로 디자인 되었고,1976년 4월 PaloAlto에 있는 Homebrew 컴퓨터 클럽에서 처음 출시되었다. 그러나 애플 I은 MOStek6502라는 이름의 칩을 기반으로 하여, 당시 출시된 인텔 칩 기반의 대부분 컴퓨터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애플I은 몇몇의 작은 소매상에 의해 서킷 보드(circuitboard)만 포함된채 666.66달러에 판매되었다(apple-history website).다시 말해, 전원을 넣는 파워나 키보드는 따로 구입해야 했다. 결국 애플I은 전문 지식을 갖춘 일부 사람에게만 운이 좋게 200대 정도 팔리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면서 스티브 잡스는 개발자가 아닌 소비자 중심에 눈을 떠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애플의 성장 과정



2) 최초의 컬러모니터를 갖춘 애플II(AppleII),애플 성공의 첫 사례


스티브 잡스가 창업을 한 1970년대 말의 첨단 기술 산업체들의 이름은 그야말로 첨단적인 느낌을 주는 브랜드명을 갖고자 하는 것이 보편적 트렌드였다.IBM,제록스,HP,그리고 MS등.브랜드명은 생산 아이템의 성격을 연상시키므로 동일한 이미지의 연상을 유도하는 작명이 정석이다. 


그런데 컴퓨터 제조사의 이름을 ‘사과(AppleComputer)’라고 명명하였다. 일반 마케팅에서는 기피해야 하는 작명이다. 브랜드네임으로서 사과(Apple)라는 이름은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로 사람들에게 쉽게 각인되었다(김정남,2010:71). 브랜드네임에서 이미 보여주듯이 애플은 친숙한 이미지를 구현하는 컴퓨터를 개발했다. 


마케팅 포커스 역시 친숙한 이미지와 맥락이 상통하는 ‘사용하기 쉬운 컴퓨터’로 맞춰졌다.이러한 과정에서 애플II(AppleII)가 탄생하였다. 애플II는 동시대 다른 컴퓨터들과 달리 전원만 연결하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고안되었고 최초로 플라스틱 재질을 사용하면서 당시 ‘전문가들만 쓰는’이미지에 제한되었던 컴퓨터를 새롭게 탈바꿈하였다. 


당시로선 상당히 혁신적인 제품으로 인식되며(김정남,2010:72)애플II는 사용자들의 편의성을 고려한 최고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한 컴퓨터였다. 애플II의 디자인은 워즈니악의 애플I의 디자인을 기초로,더욱 특별해졌다. 첫째,당시에는 굉장히 희귀했던 베이지 톤의 플라스틱 케이스로 디자인 되었다. 


두 번째로,당시 온통 흑백뿐이던 컴퓨터 산업계에 컬러 그래픽을 최초로 선보였다. 또한 애플II는 업그레이드된 성능(당시 최초 64kb메모리 용량)을 바탕으로 게임 패들(paddle)과 데모 카세트도 포함하여 판매되었는데(apple-history website), 애플II는 당시 가정에서 컴퓨터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해결해야 할 실마리를 게임과 가정용 세금 계산 활용을 통하여 풀었지만 그것으로는 명분이 부족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를 통해 애플II는 기업에서 꼭 필요한 컴퓨터로 변신하게 되었다.이는 애플의 힘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과 행운이 함께한 일이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생이었던 댄 브리클린이 자신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능력과 경영에 대한 지식을 접목해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했기 때문인데, 이는 기업에서 반복해서 작성하는 장부 작성이나 계산식들을 컴퓨터에서 간단하게 처리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것이 바로 컴퓨터 최초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인 비지캘크(VisiCalC)이다. 비지캘크는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의 원조인 소프

트웨어로, 기업의 업무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킨 컴퓨터 역사에서 일대 사건이었다(김정남,2010:74). 비지캘크를 구동시킬 수 있었던 컴퓨터가 바로 애플II였고, 애플II는 이 소프트웨어 덕분에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3) 애플III(AppleIII)와 리사(Lisa)의 실패(1980∼1983)사례


그 후 출시된 애플III(AppleIII)가 실패한 배경에는 IBM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IBM은 애플의 빈틈을 발견하고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와 협력하여 반대의 길을 걸으면서 큰 성공을 이루었던 기업이다. 그것은 바로 개방성과 호환성인데, 애플은 컴퓨터 플랫폼(platform)을 독점하려는 행보에서 폐쇄성과 비호환성을 고집하였다. IBM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최초로 컴퓨터에 대한 표준 규격을 제공하고 다른 회사들이 이 규격을 지킨 컴퓨터를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게 하였다(김정남,2010:207). 


결국 애플II의 점유율이 IBM 제품에 역전 당했는데,애플은 IBM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애초부터 무리하게 발매 스케줄을 잡았고 발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완성되지도 않은 애플III를 시장에 내보내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김정남,2010:110).


버그가 많고 발열과 내구성등에 많은 문제를 지닌 애플III의 판매 결과는 참담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딸의 이름을 딴 리사(Lisa)는 우수한 제품이었으나, 역시 판매에는 실패했다. 리사는 컴퓨터 사상 최초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를 선보인 제품이다. GUI는 전문적인 명령어를 입력해야 했던 MS의 DOS 시스템이 지배했던 당시, PC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할 바탕이 된 대단히 혁신적인 인터페이스 방식이었다. 


이 때 최초로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는)마우스도 함께 탄생하였다. GUI와 마우스는 스티브 잡스의 안목이 빛을 발휘한 역사적인 발견이었다. 사실 GUI와 마우스는 애플이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아니었다. GUI와 마우스는 제록스(Xerox)가 개발한 것이었다(MartynBurke,1999). 스티브 잡스는 제록스의 기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았을 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리사는 큰 규모의 사업으로 초점이 맞춰져 개발되었고, 애플은 리사가 컴퓨터로 더욱 쉽게 일을 하도록 생산성 향상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리사는 9995달러라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 탓에 팔리지 않았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매킨토시의 개발에만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 리사가 빛을 발휘하기도 전에 더 합리적인 가격의 매킨토시가 출시되면서 리사의 신용도는 급속도로 잠식되었다.




4) 매킨토시(Macintosh)의 등장(1984)과 스티브 잡스의 퇴출


스티브 잡스는 애플III와 리사의 개발에도 조금 관여를 했지만, 매킨토시의 개발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매킨토시는 텔레비전이나 세탁기처럼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매킨토시는 리사의 GUI를 더 발전시키고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여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는데, 특히 슈퍼볼(Superball)경기 중간에 단 한 번 방영된 매킨토시 런칭(Launching)광고는 아직까지도 광고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김정남,2010:111). 


매킨토시 광고는 조지 오웰의 작품 『1984』라는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조지 오웰은 1984년이 되면 세상이 급속한 과학 발전을 이뤄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오직 소수의 권력자가 모든 정보를 통제한다고 예언했다. 그는 자본과 권력을 독점한 이들을 빅 브라더라(BigBrother)고 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사생활마저도 감시할 것으로 봤다. 애플은 이 빅 브라더 이미지를 차용해서 자본과 권력의 상징인 IBM과 동일화하는 광고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오늘날,이 광고를 잊은 듯 애플은 스스로가 빅 브라더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당시에는 도발적인 광고와 함께 등장한 매킨토시에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화려한 그래픽과 뛰어난 서체 기능으로 분명 새롭고 혁신적인 컴퓨터였지만 정작 매킨토시에서 실행시킬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빈약하여 그 인기는 금세 시들해졌다. 그러나 빈약한 소프트웨어보다도 더 중대한 문제는 호환성이었다. 


IBM은 개인용 컴퓨터의 호환성이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컴퓨터가 등장해도 소프트웨어는 기존 버전의 것을 그대로 쓸 수 있었지만, 매킨토시는 애플에서 만든 다른 컴퓨터와도 호환되지 않았다(김정남,2010:115). 


매킨토시는 처음 발매될 때만 해도 10년을 앞선 컴퓨터라는 찬사를 들었지만 정작 실제 생활에서는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찬사는 곧 비난으로 돌변했다. 판매량은 부진했고 이로 인해 누군가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왔다. 이후 1985년 스티브 잡스는 펩시콜라 사에서 영입하여 CEO직을 맡긴 존 스컬리(John Sculley)와의 불화가 시작되었고, 2년 후인 1987년,존 스컬리는 스티브 잡스가 회사의 운영에 있어 위험한 인물이라 판단하여 결국 이사회에서 퇴출하였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퇴출되기 전까지 매킨토시만의 뛰어난 서체기능을 활용한 최고의 전용프린터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캐논에서 레이저 라이터라는 이름으로 전용 프린터가 발매되었고,덕분에 매킨토시는 완벽하게 부활하고 새로운 블루 오션을 창조해냈다. 매킨토시의 뛰어난 프린팅 기능을 활용한 최초의 출판용 프로그램인 페이지 메이커가 등장한 이후 전 세계의 출판사들은 원고를 편집하는 데 매킨토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김정남,2010:227). 결과적으로 애플은 개인용 컴퓨터의 점유율에 있어서는 IBM에 많이 뒤쳐졌지만 매킨토시는 다른 컴퓨터에서 제공하지 못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짐으로써 전문가들에게 꾸준히 선택받는 컴퓨터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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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재. "'애플' CEO '스티브잡스'의 인문학적 사고를 적용한 디자인 경영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한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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