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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고려시대 제사와 제기


조선왕실 제기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왕실 제사의 종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의례기로써 제기는 제사의 성격에 따라 제수의 종류나 개수가 바뀌고, 제수에 따라 제기의 기종과 문양이 연동되어 변화한다. 본 장에서는 조선왕실 제기제도의 근간이 된 삼국-고려왕실의 제사와 제기제도를 간략히 고찰한 후 조선왕실 제사의 종류와 진설원리를 파악하고 시기별 제기제도에 대해 살펴보겠다. 삼국시대 제사는 국가적 차원에서 치러져 이에 관한 기록이 사료에 등장하고 관련 유적에서 유물도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10월에 國中大會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隧神을 나라의 동쪽에 맞이하여 제사지냈다. 󰡔후한서󰡕에 고구려가 귀신과 사직 및 영성을 제사하는 것을 좋아하고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대회를 연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서 인용된 󰡔고기󰡕에 의하면 태후묘와 시조묘, 그리고 천신 및 산천에 대한 제사가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에서는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시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제천례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된 의례로 삼국시대부터 국가적인 의례로 시행되어 고구려 뿐 만이 아니라 백제가 다같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낸다’, ‘壇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낸다’라는 내용이 있어 삼국시대부터 제천단이 있고 제천례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조상제사는 종묘제인데, 고구려에서 종묘는 3세기부터 존재했다. 391년(고국양왕8)의 修宗廟 조치로 종묘의 위상이 강화되고 고구려사회의 유교적 색채가 강화되었다. 이처럼 유교식 조상제사가 국가차원에서 행해지기는 했지만 고구려 제사가 유교적 예법을 사회적 척도로 삼을 정도는 아니었으며 유교식 제사에 대한 본질적 이해보다는 필요한 부분만 선택적으로 수용해 이루어졌다.92) 고구려 제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부족하기는 하나 󰡔구당서󰡕에서 고구려인들이 그릇으로 변 ․ 두 ․ 보 ․ 궤 ․ 준 ․ 조 ․ 뢰 ․ 세를 쓴다고 하거나 음식을 변 ․ 두에 담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명들은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중국 지배층의 일상 ․ 연회기명이자 동시에 제기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기록에 등장한 기명들도 고구려의 일상 기명이자 제기로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대에는 일상기명을 부장했기 때문에 이기명들은 생전에는 일상 식기이지만 사후에는 죽은 자에게 바치는 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이후 역사시대가 전개됨에 따라 점점 일상기와 제기는 분화된다. 백제는 󰡔책부원귀󰡕에 의하면 천신과 五帝神 ․ 仇台廟 ․ 東明廟에 대한 제사를 지냈으며, 󰡔고기󰡕에는 천지신과 동명묘에 대한 제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한 제사 유적과 무덤에서 다양한 제기들이 출토되었다. 예를 들어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변 해안절벽에 위치한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에서도 3세기 후반부터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도기 ․ 금속 ․ 중국 도자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제기로 사용된 도기 항아리 ․ 器臺 ․ 고족접시 ․ 병 등이 파기된 채 땅에 묻혔다가 출토되었다 (도57).95) 또 무덤에서도 다양한 제기들이 출토되었는데,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 ․ 녹유탁잔 ․ 청동 발 ․ 청동 수저, 고창 봉덕리 1호분에서 출토된 청동탁잔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신라의 경우 󰡔삼국사기󰡕 제사지에 의하면 신라 국가 및 왕실의 조상제사에는 시조묘제사 ․ 신궁제사 ․ 종묘제사가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삼국이 시조묘와 종묘를 세워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의 제사의 경우 당나라의 제사 규정을 따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제사와 관련된 기록은 태조묘, 神宮 및 오묘와 사직에 대한 제사, 선농과 중농 및 후농의 제의 장소와 祭日에 대한 기록,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 四城門祭와 四川上祭등 別祀 등이 있다.


이와 관련된 출토품은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은제 잔들로 신라왕실의 일상기이면서 무덤에 부장된 최고급의 제기이자 부장품이라 할 수 있다. 또 경상북도 성주군 성산일대에 있는 성산가야에서 출토된 토기들을 살펴보면, 당시 지배계층의 무덤에 유개장경호 ․ 유개사이부호 ․ 고족기 등 다종다양한 제기를 묻어주었던 장례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의 제사에서는 고유신앙 ․ 불교 ․ 도교 ․ 유교의 사상과 의례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있다. 고려시대의 팔관회와 연등회는 고려의 고유관습과 결합된 불교의례로 일종의 조상제사와 제천행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에 비해 고려의 유교식 제사는 예서의 도입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는 건국 이후 지속적으로 송에 예서를 요청했고, 송으로부터 예서의 도입하여 예제를 변화시켰다. 


983년(성종2)에 송으로부터 처음으로 예서를 도입하여 유교적 관료제도와 통치 이념의 정립함으로써 정치 사회구조를 재편하려고 하였다. 숙종대에도 지속적으로 송으로부터 예서를 도입하려고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1098년(숙종3)에 󰡔개보통례󰡕를 입수한다.103) 송으로부터 여러 예서를 도입해 구축한 고려의 제사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예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예지」의 서문에는 고려 성종대에 원구에 제사하고, 적전을 갈고, 종묘를 건립하고 사직을 세웠으며 예종 대 관청을 두어 의례를 제정하였다는 내용과, 의종대 󰡔詳定古今禮󰡕 50권을 편찬하였다고 기록 등 고려의 예제가 정립되는 과정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예지」는 유학의 예의 체제와 내용으로 유교의 오례 체계인 길 ․ 흉 ․ 군 ․ 빈 ․ 가례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105)「예지」의 길례에 따르면 고려의 국가제사는 대사 ․ 중사 ․ 소사로 나누어 등재되어 있고 이 외에 雜祀라는 항목이 있다.




고려시대 길례 중 대사는 원구 ․ 方澤 ․ 사직 ․ 태 묘 ․ 별묘 ․ 경령전 ․ 諸陵이다. 원구 ․ 방택 ․ 태묘는 천자국 내지 황제의례로 행해진 의례이다. 983년(성종2) 정월에 왕이 원구제를 처음 올리기 시작하여 5방의 方位天神과 천제의 皇天上帝에게 제를 올리는 천자국의 제사를 올렸다. 또 다른 조상제사로 태묘 외에 별묘 ․ 경령전 ․ 제릉이 있는데 이는 影殿 ․ 原廟에 해당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잡사항목으로 묶은 고려의 제사에는 대사에 준하여 행해진 嶽鎭海瀆과名山大川 제사 ․ 도교 제사 ․ 동명왕 제사 ․ 수륙제 ․ 팔관회 등의 의례들이 있었다.


고려의 제사는 유교식 제사의 틀과 유사하지만, 대 ․ 중 ․ 소사로 구분되는 중국식 사전과 달리 잡사라는 색다른 사전을 도입하고 불교와 도교의 제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원구 ․ 방택 등과 같은 황제의 예로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고려의 독자성이 존재한다. 


제기제도의 측면에서 보자면 고려시대에는 송의 예제를 수용하여 예제 개혁을 이루었고 유교식 예제를 중시하여 각종 제의를 시행하고 圖式을 들여왔다. 예를 들어 고려 문종대 ‘새로 조각한 三禮圖 54판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어 송의 예제 관련 도식들이 고려로 입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송대 예제와 관련 서적들을 참고하여 1113년(예종8)에는 禮儀詳定所를 설치하고 의종대에는 󰡔詳定古今禮󰡕를 통해 고려의 예제를 완성하였다. 또 제기 수급을 담당할 관서인 제기도감을 설치하여 御用器碗을 담당하게 하고 송의 제기를 참고하여 제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송에서 직접 제기가 유입된 사실도 기록으로 확인되는데, 예를 들어 󰡔송사󰡕중 휘종대에 변(12개) ․ 두(12개) ․ 보(4개) ․ 궤(4개) ․ 등(1개) ․ 형(2개) ․ 정(2개) ․ 뢰(1개) ․ 세(1개) ․ 준(2개) 등의 제기를 고려로 보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09) 이 외에도 󰡔해동역사󰡕에는 송 정화6년(예종11)에 고려의 사신들에게 ‘변 ․ 두 ․ 보 ․ 궤 ․ 준 ․뢰 등의 제기도 하사하였다’고 하여, 중국 유교식 제기들이 송 황실을 통해 국내로 지속적으로 유입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 유교식 제기들은 󰡔고려사󰡕 「예지」의주들에 실린 제기에 그대로 등장하여 고려 왕실 제사에서 진설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현전하는 고려왕실의 제기도설이 없어 양식이나 재질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조선왕실 제기의 기종이 이미 고려왕실의 제사에서도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문묘제사는 고려 후기에 수용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신라에 태학과 공자묘가 존재했고 고려 전기에는 불교를 숭상하는 분위기 속에서 국자감이 설치되었고 문묘의례가 행해졌다. 고려후기에 공자를 성인으로 존숭하였고, 이 과정에서 1303년(충렬왕 29)에 고려 말 安珦(1243-1306)이 중국으로부터 공자 및 그의 제작 70명의 초상화와 함께 제기․ 악기 ․ 경서 등을 구입해 와서 비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말 문묘 제도와 규모가 크게 정비되면서 문묘 제기 구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 말에 수입한 문묘제기와 경서에 대한 지식이 조선 초 왕실 제기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석전의󰡕를 중요하게 참용하게 된 배경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가 송으로부터 제기를 들여온 정황뿐 만 아니라 고려 말 제기제도와 제물을 마련하며 관원들의 기강을 정비하는 내용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寢園署가 아뢴 내용 중 ‘종묘 제사는 나라의 큰일임에도 보궤변두를 채우는 일과 제물을 갖추는 관원의 기강이 무너져 報本追遠하는 도리가 아니다’라는 언급이 등장하기도 한다.112) 이처럼 중국으로부터 제기나 예기도가 실린 예서를 고려로 수입하고, 이를 참고하여 국내에서도 유교식 제기를 제작하면서 종묘제사를 지내고자 정황을 알 수 있다. 고려왕실의 제기에 대해 살펴보면, 우선 원구와 방택에서 사용한 고려 왕실의 제기는 문헌상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관련 유물도 규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비해 왕실 조상의 신위를 모신 태묘제사의 제기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묘는 역대 왕실 조상의 신주를 봉안하고 모시는 유교 공간으로, 태묘제는 인귀에게 올리는 제사 중 가장 위계가 높은 제사이다. 󰡔고려사󰡕의 태묘 제사 관련 기록 중 체협친향의의 의순과 진설제기에 관한 내용을 보면, 순서가 齋戒-陳設-鑾駕出宮-省牲器-晨祼-饋食-送神-鑾駕還宮의 순으로 진행된다. 진설부분에 등장하는 제기들은 변 ․ 두 ․ 보 ․ 궤 ․ 등 ․ 형 ․ 조 ․ 옥작 ․ 유이 ․ 호이 ․ 희준 ․ 상준 ․ 착준 ․ 호준 ․ 대준 ․ 산뢰 ․ 찬 ․ 작 등으로 다양하다. 


고려왕실 태묘 제사의 제기와 진설방식을 조선왕실 종묘 제사와 비교해 보면 대부분 조선왕실 제기와 일치하지만 옥작 ․ 유이 ․ 호이 등 일부 기종은 고려 태묘 제사에만 확인되는 기종이어서 고려 태묘 제사와 조선 종묘 제사에서 사용하는 제기 기종에 차이가 존재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고려왕실에서는 태묘제사 뿐만 아니라 여러 성격의 제사가 행해졌다. 태묘 외에도 조상제사를 거행한 공간은 경령전 ․ 孝思觀 ․ 藝祖廟 등으로 같은 인물을 위한 영전이나 원묘를 두었다. 경령전은 고려 태조와 역대 국왕의 어진을 봉안한 별묘로 제기 등의 제사 도구를 독자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충렬왕 원년인 1275년 帶方公 王澂과 고관의 자제[衣冠子弟] 열 명을 뚤루게[禿魯花]로 원나라에 보내면서 경령전 5실에 있는 白銀제기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경령전의 제기 중에 백은으로 제작한 제기를 사용했다는 중요한 단서를 알려준다. 이와 비교하여 조선왕실에서 경령전과 같은 성격의 건물인 선원전 제사에서도 은잔 등 은재질의 제기를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조선의 선원전과 고려의 경령전 제기 간에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고려에서도 조선처럼 흉례에 해당하는 상장례 기간에도 각종 의례가 행해졌다. 고려 왕실에서 국상이 나면 宣德殿 ․ 延英殿 등 궁궐내의 전각에 빈소를 마련하여 魂堂으로 삼았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 혼전으로 이어져, 조선왕실에서 태조와 神懿王后를 위해 마련한 첫 혼전인 문소전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고려와 조선의 제사와 제기제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되, 시대와 국가철학에 따라 변화한다. 


현전하는 고려시대 유물을 살펴보면, 제기로써 명확하게 용도를 구분할 수 있는 경우는 주로 명문이 남겨진 청자제기들이다. 고려의 유교식 제기는 10세기 생산유적에서 확인되었으며 10세기 이후의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 초기의 예로 황해도 배천군 원산리에서 출토된〈靑磁淳化三年銘豆〉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의 〈靑磁淳化四年銘壺〉를 들 수 있다. 먼저 황해도 배천국 원산리 요지의 2호 가마 바닥 최상층부에서 발견된〈청자순화삼년명두〉는 굽바닥에 ‘淳化三年壬辰太廟第四室享器匠王公託造’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도62). 기년인 순화삼년을 통해 992년(성종11)에 제작되었고, 태묘 4실인 광종의 묘당 제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존 연구들에는 󰡔삼례도󰡕의 두 기형에 근거하여 제기 중 한 기종인 두라고 칭했는데, 필자 역시 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다만 제기 중 흙으로 제작한 瓦豆는 木豆나 草豆와 구분하는데 초두가 일반적인 두이고, 와두는 豋 ․ 㽅이라 한다. 따라서 청자로 제작한이 기물이 두가 아닌 등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다음으로 일명〈청자순화사년명호〉에도 굽바닥에 음각으로‘淳化四年癸巳太廟第一室亨器匠崔吉會造’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도63). 


이를 통해 순화4년인 993년(성종12)에 태조 왕건 사당인 태묘 제일실에 쓰는 亨器라는 점과 崔吉會라는 장인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계에서는 이 제기를 준 중에서도 호준이나 대준으로 파악하였는데, 형태의 특징상 대준과 가장 유사하다. 두 유물의 정확한 기종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더라도, 고려 성종대 유교식 종묘 제사가 실행되었다는 점과 유교식 제기가 제작되었다는 정황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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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혜인. "조선시대 왕실 제기(祭器)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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