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조선-대한제국기 왕실제사 


조선의 제사는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새롭게 모색된 것이 아니라 고려의 유교식 제사와 풍속 그리고 13세기 이래 원으로부터 전해진 성리학의 영향을 받았다. 13세기 몽고군의 침략결과 고려는 원간섭기에 진입하면서 원으로부터 성리학이 전해졌다.125) 고려말기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는 유교 질서에 따라 국가체제에서 그들이 왕과 함께 독립적이고 주체적 위상을 갖는 것이 정당한 국가질서론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송대 주자학으로 그 이학체계를 확립했던 송대 학자들이 정치 ․ 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만들어낸 질서론으로 家禮의 논리체계를 세웠던 것과 일치한다. 송대 오례의 영향을 받아 조선은 개국과 함께 국가의 구성요원으로서 서민을 포함하여 사대부의 위상을 높이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등차적으로 의례를 포괄한 국가예제를 만들었다. 


또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불교와 도교 의례를 서서히 폐지하고, 무속신앙은 국가사전으로 전환시키는 등 유교 중심의 사전체계를 형성시켰다. 조선시대에 확립된 유교의례는 연원을 따지면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이며,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고려시대이다. 그렇지만 고려시대 예제는 유교적 예제를 철저히 적용하지 않았으며 국가 제사의 경우도 불교 및 도교 의례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 제사 의례가 유교적으로 정비되는 시점도 조선 초기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불교 ․ 도교 ․ 유교식이 병용된 고려의 제기가 아니라 오로지 유교의 경전과 의례서에 기록된 적통의 유교식 제기를 사용해야할 당위성과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 길례: 정제와 속제


조선 왕실은 한양으로의 천도 이후 正殿을 중심으로 중국식의 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종묘와 사직단을 각각 건립하여 유교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명확히 보여주는 도시공간 구성을 이루었고, 태종대에는 각종 제단들이 거의 조성되어 국가 사전을 위한 공간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태조 대부터 󰡔고금상정례󰡕와 󰡔홍무예제󰡕를 바탕으로 하여 논의되었으며, 세종대에 집현전을 중심으로 여러 古制들을 참용하여「오례의」로 체계화 되었다. 조선 초기 오례를 완성하는 과정에는 일정한 제약이 따르기는 했으나 국권의 확립이 라는 당면한 정치적 관심 속에 왕실과 사대부 관료들 모두가 오례 체제 정비와 운영을 일치하여 추진하였다. 


오례 체제는 사대부관료들이 자신의 정치적 위상 설정과 그들이 왕권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왕실과 일정한 협력한 것 뿐 만 아니라 오례구조를 변용시키기도 하였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송대의 󰡔태상인혁례󰡕를 참용하여 사대부와 서민의 위상을 오례구성에 적극 포섭하여 구현하고자하였고, 이 같은 변화된 오례의 변용은 조선조 오례 제정에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만들어진「오례의」를 바탕으로 하여 1475년(성종5) 조선의 국가의례의 근간이 된 󰡔국조오례의󰡕가 완성된다. 


󰡔국조오례의󰡕 에 수록된 변사는 이후 국가전례서를 편찬할 때마다 부분적으로 일부 제사가 도입되고 일부는 폐지되지만, 조선시대와 대한 제국기까지 나라 제사의 기본 뼈대가 되었다. 󰡔국조오례의서례󰡕에서는 조선왕실 길례 제사를 정제와 속제로 구분하고, 제기도 정제용 제기와 속제용 제기로 구분하였다. 중국 예전의 유교방식 ․ 절차 ․ 형식을 따른 제사를 정제라 하고, 유교 경전에 나오지 않거나 종법 질서에 맞지 않지만 조선의 관습이나 인정의 보편성에 의해 거행하는 제사를 속제라 한다. 


일견 정제와 속제는 제사의 위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지만, 이 분류는 공간이나 제물의 구성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고려시대 정제와 바뀐 점이 있다면 고려시대에는 중국 천자가 지내는 원구와 방택이 있었고 세종대까지 유지되었지만, 성종대에 여러 논의 끝에 제후국의 제도를 따라 원구와 방택을 지내지 않기로 한다. 또 고려가 중국과 동일하게 태묘라 부른 대사가 조선에서는 종묘제사로 바뀌고, 중사 중 籍田이 先農祭로 바뀌는 등 명칭의 변화가 있었다.


조선왕실의 정제는 대사 ․ 중사 ․ 소사로 구분된다. 󰡔국조오례의서례󰡕에 따르면 대사는 가장 높은 등급의 제사로 사직 ․ 종묘 ․ 영녕전의 제사가 이에 해당한다. 중간 등급의 중사는 풍운뇌사 ․ 악해독 ․ 선농 ․ 선잠 ․ 우사 ․ 문성왕 ․ 역대시조의 제사이다. 가장 낮은 등급의 소사는 영성 ․ 노인성 ․ 마조 ․ 명상대천 ․ 사한 ․ 선목 ․ 마사 ․ 마보․ 마제 ․ 영제 ․ 포제 ․ 칠사 ․ 독제 ․ 여제가 기록되어 있다. 정제의 대사 ․ 중사 ․ 소사는 정해진 날이 있어 이 날짜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정기제사이다.130) 정제 중에서도 비정기 제사를 모아 祈告라 하였는데 사직 ․ 종묘 ․ 풍운뇌우 ․ 악해독 ․ 명산대천․ 우사 등이 있다. 정제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속제가 있다. 원래 속제는 세속에서 관행적으로 시행되던 제사이다. 


조선시대 속제는 문소전 ․ 진전 ․ 산릉 제사 등으로, 문소전은 대표적인 원묘에 속하고 진전도 원묘에 포함되며 산릉은 왕실 조상의 시신을 모시는 장소이다.속제란 용어에는 정제가 아니라는 배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나 이는 분류상의 용어일 뿐으로, 조선후기로 갈수록 조상제사에 대한 의미는 여전히 각별해져 속제의 종류와 횟수가 더욱 늘어났다.


정제에는 반드시 犧牲을 올리지만, 속제에는 희생을 생략하고 대신 유밀과를 중심으로 한 제물을 올린다. 유교에서는 희생을 올리는 것은 제사의 대상을 신으로 간주하는 태도이나, 속제에서는 살아계실 때 즐겨 먹은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한다는 人道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속제 중에서도 고기반찬을 올리는 제사와 고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제사로 구별되는데 문소전에서는 생시에 부묘를 모셨던 방식을 따라 고기반찬을 올렸으나, 왕릉에서는 고기반찬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132) 제수의 차이는 제사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고 제사의 성격은 제기의 재질 기종 양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조선왕실 길례용 제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사를 정제와 속제로 나누고 그 안에서 다시 사전체계별로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왕실은 길례의 정제와 속제란 두 체계를 조선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변함없이 운용하였다. 


다만 시대에 따라 새로운 제사를 추가 혹은 삭제하거나 일부 제사의 경우 사전체계에서 격상시키기도 하는 등 정제와 속제란 큰 틀 안에서 변화가 존재하기도 하였다. 마찬가지로 길례의 정제용 제기와 속제용 제기도 조선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보수적으로 유지되는 경향을 갖되, 일부 제사체계의 변화나 중국 전례서의 도입등으로 인해 일부 양식 변화가 발생한다.




2. 흉례: 전과 제


흉례는 喪 ․ 葬에 관한 모든 의식 절차로, 유교식으로 치르는 상장례이다. 죽음은 종교와 철학의 궁극적 관심사이지만, 유학에서는 죽음이나 내세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학은 또 다른 방식, 즉 상례와 제례라는 형식주의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대하였다. 유교에서 상장례는 孝라는 정서와 맞닿아 있다. 조상신이 된 부모님에게 제례를 올리는 것은 길례이지만, 돌아가신 날로부터 3년간(실제로는 27개월) 이루어지는 상장례는 비통함과 애절함으로 지내는 흉례이다. 


효를 버리고 유학의 상장례를 논할 수 없고, 맹자는 산 부모님을 섬기는 것보다 죽은 부모를 보내는 것이야말로 더 큰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자가례󰡕에서는 상장례를 죽은 부모에 대한 추모의 정을 예에 따라 표현함으로써 효를 마지막으로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134) 왕실의 흉례가 진행되는 공간은 빈전 ․ 혼전 ․ 산릉이다. 󰡔국조오례의서례󰡕「흉례」에는 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총 91개조의 복잡한 의절들이 담겨있다. 


국가 또는 왕실의 상례 의식은 민간의 상례 의식에 비해 장중하고 복잡한데, 이는 흉례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기에 효과적인 의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장례는 대상에 따라 國葬과 禮葬으로 나뉘는데 국장은 태상왕 ․ 태상왕비 ․ 왕 ․ 왕비 등의 喪事이고, 예장은 왕세자 ․ 세자빈 등 중요 왕족의 장례이다. 흉례의 절차는 成殯奠儀 ․ 殯殿儀 ․ 山陵儀 ․ 魂殿儀로 구분되어 이루어지며 시간과 공간이 바뀔 때마다 의례의 성격도 변화한다(표32).135) 27개월에 걸친 왕실의 상장례는 마지막으로 신위를 종묘에 안치하면서 종료된다. 이 과정에서 음식을 끊임없이 올리는데 이 때각 절차와 공간의 성격에 부합하는 기명을 선별하여 사용한다.


흉례에서 음식을 올리는 의식은 전과 제로 구분된다. 전은 살아 있을 때 먹는 식사의 연장이라면 제는 인간과 구분되는 조상신에게 드리는 음식으로 간주하였다. 전은 상례에서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망자에게 음식을 올리는 의식이고, 제는 장례를치른 후 신주를 대상으로 음식을 올리는 의례이다. 조선왕실 국장에서 시신을 목욕시키고 습의를 입힌 후 襲奠부터 전이 시작되어 시신을 능에 安葬한 후 지내는 입주전까지 전이 이어진다. 


정기적으로 올리는 전은 하루 중 아침과 저녁, 그리고 한 달 중 그믐과 보름에 음식을 올리는 朝夕奠과 朔望奠이있고, 특정한 상례절차를 수행한 후 음식을 올리는 전은 습전 ․ 小斂奠 ․ 大斂奠 ․ 成殯奠 ․ 成服奠 ․ 啓殯奠 ․ 조전 ․ 견전 ․ 천전 ․ 입주전 ․ 안릉전 등이 있다. 전은 아직 제사의 단계에 진입하였다고 볼 수 없어 전에서 사용하는 기명들을 제기라고 부를 수 없으나 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본고에서는 전에서 사용하는 기명도 함께 다루고자 한다. 제는 시신이 땅에 묻히고 신주가 망자를 상징하는 신체가 된 후부터 올리는 의식을 의미하는데 첫 제사를 우제라 한다. 혼전의 대제는 우제-졸곡제-연제(13개월째)-상제(25개월째)-담제(27개월째)의 순으로 치러진다.


또 혼전에서는 사시제, 납향 등의 친향제와 삭망제를 비롯하여 매일 조석상식 등도 차려지고 이 외에 별도로 다례도 행해졌다. 이처럼 상장례 기간 동안 빈전 ․ 산릉 ․ 혼전에서 음식을 올리는 제와 전이 끊임없이 행해지면서 흉례의 절차와 성격도 점진적으로 변해 점차 길례와 가까워진다. 이 때 제수 뿐 만 아니라 제기에도 절차의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2020/08/28 - [교육] - 삼국-고려시대 제사와 제기 알아보기

2020/08/28 - [교육] - 조선-대한제국기 왕실제사 살펴보기


구혜인. "조선시대 왕실 제기(祭器)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