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조선왕실 제기의 성격과 의미


첫째, 조선왕실 제기의 범위는 길례와 흉례의 제기를 포괄하며, 조선왕실에서는 각제사의 성격에 따라 제기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조선왕실의 오례 중 제사가 행해지는 의례는 길례와 흉례인데 그 중 왕실이 행하는 대부분의 의례는 길례의 제사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길례를 대표하는 종묘제기를 조선왕실 제기 전체를 아우르는 제기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조선왕실의 길례는 종묘제사가 포함된 정제 외에도 속제란 제사의 영역이 있다. 그리고 길례 외에도 흉례에서도 전 ․ 제 ․ 상식 등의 여러 의례를 지냈는데 제사의 성격마다 제기를 선별하여 사용하였다.


우선 길례용 제기는 길례의 제사 성격에 따라 정제용 제기와 속제용 제기로 양분할수 있다. 정제와 속제를 구분하는 기준은 유교경전의 등재 여부와 희생의 사용 여부에 따라 구분되는데, 정제에서는 유교의식을 다룬 예서에 등재된 유교식 제기를 사용하고 속제는 유교식 제기가 아닌 복합적인 기종과 양식의 제기를 주로 사용한다. 정제용 제기는 유교예서에 기재된 제기를 공통적으로 사용되는데 비해서, 속제용 제기는 각 제사 성격과 위격에 따라 다종다양한 제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한편 흉례용 제기도 제기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다. 


그동안 흉례용 제기는 제기의 범주내의 제기로 인식되지 못했는데, 흉례가 아직 제례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과도기적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흉례의 제와 전이 길례로 변모하는 과정의 순차적 전이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흉례에 사용하는 기명을 제기의 범주에 포함시켜 살펴보았다.


이처럼 조선왕실의 제기의 범위는 길례 정제 뿐 만 아니라 속제 그리고 흉례의 제기들까지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또한 제사의 각 성격에 부합하는 제기를 선별하여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제기를 제사의 성격에 따라 분석해야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둘째, 왕실 제기는 양식을 통해 제사의 속성을 표상한다. 제사의 속성과 공간에 따라 제기의 기종 ․ 재질 ․ 조형 ․ 문양을 달리 사용하는 방식으로 제기를 통해 제사에 대한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제사가 이루어지는 중심공간에 진설된 제기는 기종 ․ 재질 ․ 양식을 통해 제사의 속성을 표시하므로, 제기에 관한 연구는 왕실의례문화로서 중요한 연구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정제용 제기는 각 제수마다 상응하는 제기들이 1:1로 대응하여 모두 정해져 있다. 기종으로는 변 ․ 두 ․ 보 ․ 궤 ․ 등 ․ 형 ․ 조 ․ 모혈반 ․ 생갑 ․ 작 ․ 찬 ․ 이 ․ 준 ․ 뢰 ․ 멱 ․ 용작 ․ 정 ․ 난도 등을 사용하고, 재질로는 초목 ․ 금속 ․ 도기 ․ 섬유 등을 사용한다. 금속 중 유기재질의 재료를 쓰는 제기가 전체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나, 금속 재원이 마련될 여건이 되지 않을 때는 도자제기를 사용하여 대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제에 속하는 제천례에서는 근본에 보답한다는 이유로 자연의 질박함을 닮은 초목재나 도자기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제천례는 조선시대 내내 설행된 것은 아니어서 정제용 제기의 성격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정제용 제기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정제용 제기의 문양은 유교경전에 그려진 제기의 문양을 조선시대 내내 그대로 고수하였는데 일부 문양이 없는 기종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치밀하게 문양을 채워 넣어 정제용 제기가 갖는 상징성을 문양으로써 시각화했다. 그 예로 탐식을 경계하는 도철, 벽사의 역할을 하는 눈 모양(이목 ․ 사목), 자연의 이치를 형상화하여 양기와 음기를 나타낸 음양문, 小食을 상징하는 거북문, 임금의 은혜를 번개에 은유한 뇌문, 상서로운 구름을 형상화한 운문 그 외 각종 동물인 소 ․ 코끼리 ․ 닭 ․ 양 ․ 돼지 ․ 봉황문 등이 정제용 제기에 장식되었다. 이러한 정제용 제기의 기형과 문양은 조선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큰 변화 없이 보수적으로 유지된다.


다음으로 속제용 제기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비유교식 의례기명을 비롯하여 조선왕실의 일상기 혹은 연향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희생을 제물로 올리지 않고 면 ․ 탕 ․ 떡 ․ 식해 ․ 과일 등의 일상식과 각종 유밀과 등의 연향음식을 올린다. 이에 유밀과를 담을 우리를 비롯해 적기 ․ 탕기 ․ 면기 ․ 시접 ․ 잔 등의 일상기이자 연향기의 기종을 사용한다. 


더불어 정제용 제기가 일정한 규칙에 의거해 제기를 사용한 것에 비해 속제용 제기는 제사 공간이 진전 ․ 본궁 ․ 산릉 ․ 궁묘 등으로 다양한 만큼 공간에 따라 제기 기종도 다양하게 사용한다. 속제용 제기의 재질은 문소전에서는 시대에 따라 은 백자 ․ 유기를 사용하였고, 진전에서는 옥 ․ 은 ․ 유 ․ 칠기를 사용하였다. 산릉에서는 주로 유기와 백자류를 사용하고, 본궁에서는 주로 유기를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궁원에서는 금 ․ 은 ․ 유기 ․ 백자를 사용하는 등 각 공간에서는 다양한 재질의 제기를 사용하였다.


속제용 제기의 문양은 일월 ․ 쌍룡 ․ 용 ․ 국화 ․ 매화 ․ 모란 ․ 박쥐 ․ 토끼 ․ 삼족오 ․ 문자 ․ 산수 ․ 만자 ․ 칠보 ․ 산예문 등 다양한 문양이 사용되었다. 이 문양들은 왕실 일상의 의식주와 연향 관련 의례기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문양들로, 대부분 정제용 제기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문양들이다. 동시에 정제용 제기에서 보이는 문양들은 속제용 제기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문양이 대부분이어서, 정제용 문양과 속제용 문양은 정과 속의 구분처럼 비교적 엄격히 나누어져 있었다. 정제용 제기 문양의 의미가 경계, 벽사, 희생,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 등을 상징한다면, 속제용 제기 문양은 기복과 상서와 관련된 문양이 대부분이다. 


주로 속제용 제기는 정제용 제기처럼 거의 모든 기종에 문양이 시문되기 보다는 잔 ․ 병 ․ 합 등에 문양이 시문되고 많은 수량이 사용되는 접시에는 문양이 시문되지 않아 시문하는 기종도 한정적이란 점을 알 수 있다. 이역시 문양도 제사의 속성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흉례용 제기는 3 여 년간에 걸친 긴 흉례기간 동안에 이루어지는 만큼 시기마다 다른 제기를 사용하였다. 흉례의 제사는 전과 제로 구분되어 전 ․ 조석상식 ․ 주다례 등에서는 속제에서 사용하는 금은잔 ․ 백자준 ․ 우리 등을 사용하였고 동시에 혼전의 제사의식에서는 작 ․ 이 ․ 준 ․ 뢰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상장례 기간 동안에 정제에서 사용되는 제기 기종 일부와 속제에서 사용되는 제기 기종 일부를 함께 사용하다가 3년 상이 끝나면 비로소 흉례가 길례의 정제와 속제로 나뉨에 따라 각각의 성격에 맞게 정제용 제기와 속제용 제기로 엄격히 분리하여 사용한다.


드물게 일부 제사 중 속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사전체계에서 정제로 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제사의 속성변화와 연동되어 제기도 속제용 제기가 아닌 정제용 제기로 교체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모궁으로, 원래 속제에 속하였으나 정조대 정제의 중사로 격상하여 제사를 지내면서 종묘에 버금가는 수준의 제사를 지냈다. 그변화에 맞추어 경모궁의 제기를 종묘대사에 버금가는 수준의 제기를 갖추었는데, 다만 변과 두의 수를 종묘대사 보다 각각 2개가 적은 10개씩 진설하여 종묘대제와 완전하게 동일하지 않고 약간의 차이를 두었음을 표상하였다. 


즉 제기는 제사와 긴밀히 연동되며 제사의 속성과 위계를 가시화하는 중요한 물질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수 점 현전하는 경모궁 제기에 대해 조형적 양식 분석 뿐 만 아니라 경모궁 제기가 갖는 정제용 제기로써의 위치와 의미에 대해 복합적으로 고려한다면 경모궁 제기의 양식을 보다 풍성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왕실 제기는 제수를 담는 용기로써의 실용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기종과 조형양식이란 방식을 통해 제사의 속성을 상징하고 다른 성격의 제사와 구분시키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제기 양식과 제사 성격 간의 긴밀한 관계에 주목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2020/08/28 - [교육] - 조선-대한제국기 왕실제사 살펴보기

2020/08/28 - [교육] - 삼국-고려시대 제사와 제기 알아보기


구혜인. "조선시대 왕실 제기(祭器)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